나를 단련시킨 것은 아버지와 가난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는 내게 큰 선물을 준 셈이다.
나의 성장기는 아픔의 연속이었지만 그 아픔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이 모든 과정 속에 아버지라는 존재가 아프게 자리 잡고 있다.
아버지는 성공과는 거리가 먼 분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내가 아버지를 싫어한 이유는 성공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가장의 역할을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5남 2녀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위로 형이 셋, 누이가 하나 있었고, 밑으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하나씩 있었다.
이렇게 많은 자식을 두었는데도 아버지는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가사를 책임지고 자식들을 길러낸 사람은 바로 어머니였다.
아버지도 한때는 대학생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현재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청구대학에 다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중퇴를 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꾼이 되었다.
도저히 학비를 마련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논밭 하나 없이 화전을 일구어야 할 만큼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무리였을 것이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공부’라는 말만 나오면 표정이 일그러졌고, 자식의 교육에도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아버지는 심지어 내가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것조차 반대하며 번번이 훼방을 놓았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아버지는 돌연 집을 나가버렸다.
말도 없이 무기한 가출을 한 것이다.
어머니와 7남매의 생계 따위는 아버지의 안중에 없었다.
혼자서 7남매를 키워야 했던 어머니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렇다 할 돈벌이를 찾기도 어려운 시골에서 어머니는 남의 집에 들어가 허드렛일을 하며 날품팔이 삶을 살았다.
말 그대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위태로운 나날들이었다.
심지어 어머니는 그 당시 불법인 줄 알면서도 몰래 막걸리를 빚어 팔기도 했다.
퉁퉁 불어터진 어머니의 손을 볼 때마다 나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증오하고 또 증오했다.
힘겨울 때마다 이 모든 시련이 아버지 때문이라는 생각에 저주의 감정마저 들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에게서 어느 날 연락이 왔다.
경기도 성남이라는 곳에 터전을 마련해놨으니 모두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들뜬 마음을 안고 고향을 떠나 성남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내 절망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어 성남시에 정착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성남시 상대원동 공단지역에서 잡역부로 일하고 있었다.
집이라는 것도 달랑 단칸방 하나여서 여덟 식구가 다닥다닥 붙어 자야만 했다.
들어본 적도 없는 성남이라는 도시와 나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당시 성남시는 서울에서 이주해온 이른바 ‘달동네’ 출신들로 북적였다.
서울의 청계천·창신동·금호동 일대 판자촌에 재개발이 이루어지면서 그곳 서민들을 이주시켜 만든 황량한 도시가 바로 성남시였던 것이다.
맨주먹으로 살기엔 차라리 고향인 안동 산골보다 못해 보였다.
고향에서는 그나마 열심히 땅을 파면 입에 풀칠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살던 공단지역에서는 먹고살기 위해 누구나 공장 노동자가 되어야 했다.
내가 12세의 나이에 공장에서 일하게 된 것도 생존을 위한 필수 코스일 뿐이었다.
공장 생활은 산재 사고와 중노동, 그리고 무수한 구타로 점철된 시련의 시간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폭력은 이미 익숙한 것이기도 했다.
고향인 안동의 초등학교에서도 교사들에게 수없이 매를 맞으며 자랐다.
집이 가난해서 학습 준비물을 가져가지 못한 아이들은 무조건 매를 맞아야 했다.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았다. 억울하고 화가 나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교사가 학생을 때리는 것까지 교권이라 여기던 시절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매를 맞아야 했던 나는 복수심에 불탄 나머지 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기에 이르렀다.
실컷 때려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꿈은 공장 생활을 하면서 변했다.
교사에서 공장 간부로 꿈이 바뀐 것이다.
공장 간부가 되려면 적어도 고등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그런데 그 꿈을 가로막은 가장 큰 걸림돌이 아버지였다.
“공장에서 착실히 일이나 할 것이지 쓸데없는 공부는 무슨 공부!”
아버지는 내가 공장에서 사고를 당하고 매일 같이 구타를 당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공부를 해서 바꿀 수 있는 운명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아니면 자식의 공부 뒷바라지를 해주지 못하는 자격지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아버지가 뼛속 깊이 절망으로 가득 찬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최소한의 긍정도, 한 줌의 희망도 없는 삶. 그런 인생을 자식에게 고스란히 물려줄 생각이었던 걸까.
나는 공장에서 간부들이 휘두르는 주먹보다 아버지의 그 절망이 몇 곱절 더 아팠다.
절망에 빠진 사람은 주변 사람들까지 절망의 늪으로 끌어들인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어떻게 보면 내가 정말로 극복해야 할 대상은 가난과 시련이 아니라 아버지였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습니다.’
나는 이 마음 하나로 독하게 공부를 해나갔다.
그리고 중학교 검정고시를 거쳐 고등학교 검정고시까지 마쳤다.
나는 ‘해냈다’는 심정으로 고등학교 검정고시 합격증을 제일 먼저 아버지에게 보였다.
아버지는 합격증을 받아들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수고했다’, ‘잘했다 ’는 말 따위는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최소한 고개 정도를 끄덕여줄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 공단 거리를 걷고 또 걸으며 울분을 삭였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무릎이 꺾이고 말았다.
방바닥에 합격증이 갈기갈기 찢어진 채 흩어져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받은 합격증인데···.’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그렇게 켜켜이 쌓여갔다.
대학 재학 시절 나는 사법고시 1차에 합격했지만 2차에서 낙방하고 말았다.
졸업 후에 다시 도전해서 1차에 합격했을 때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지병인 위암이 재발한 것이다 .
그때 문병을 온 친척 한 분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아버지가 자네 자랑을 많이 하더군.”
알고 보니 아버지가 친척들 앞에서 ‘우리 재명이를 내가 법대에 보냈네’라며 자랑하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씁쓸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여야 했다. 검정고시로 중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따고, 공장에서 일하며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내게 한마디 격려조차 없었던 아버지가 무슨 낯으로 그런 소리를 한단 말인가.
내 속에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다시 솟구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내게 도움을 전혀 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사법고시 공부를 위해 신림동 고시원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가 몇 달 치 월세를 보내준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내가 대학을 졸업한 직후여서 매월 학교에서 20만원씩 받던 생활보조금이 끊어진 상태였다.
그 사정을 알고 내 통장으로 돈을 넣어준 것이다.
고시 공부에 전념해야 할 때라 한두 푼이 절실했던 나에게는 더없이 고마운 돈이었다.
한편으론 그것이 아버지와 나눈 최초의 화해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사법고시 2차에 합격했다.
최종 합격 발표 후 어느 날 아버지와 마주했다.
그 무렵 아버지는 말을 단 한마디도 못 할 정도로 병이 악화되어 집에서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버지 사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나는 병상에 누워 잠든 아버지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아버지는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내 목소리는 알아들은 것 같았다.
잠시 후 아버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는 무엇인가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아버지가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은 느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곧이어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지는가 싶더니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아버지의 눈물 젖은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
‘아버지, 사실은 제가 잘되기를 바라셨죠? 모른 척하면서도 저를 쭉 지켜봐 주신 거죠?
제가 마음 단단히 먹고 살아가기를 바라신 거죠?’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은 그 큰 과거의 아픈 벽을 허물고 화해했다.
그 후 아버지는 다시 깨어나지 못한 채 한마디 유언도 없이 영원히 잠들었다.
어쩌면 그 눈물 속에 모든 말이 담겨 있었던 게 아닐까.
당신의 한 많은 인생에 대하여, 부자의 정을 한 번도 나누지 못한 채 떠나는 회한에 대하여···.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날은 공교롭게도 내 생일이었다.
그리고 돌아가신 시간도 내가 태어난 시와 똑같았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그날, 그 시간에 맞춰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날의 임종은 결국 아버지와 나만을 위한 마지막 화해의 순간이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가슴 속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오랫동안 뿌리 깊이 박혀 있던 원망도 완전히 사라졌다.
그 뒤로 여러 해가 흐르면서 나는 한동안 아버지를 잊고 지냈다. 하지만 문득문득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인권 변호사로서 시민운동을 하다가 수배자로 몰려 수난을 당할 때, 정치에 입문해 정적들이 나를 함부로 겁박할 때, 가족 문제로 큰 시련을 겪을 때, 답답하고 억울하고 마음이 지칠 때마다 어김없이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매번 거짓말처럼 오기와 투지가 솟아나곤 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아들 앞에서 눈물 흘리던 그 얼굴이 나에게는 용기의 원천이 된 것이다.
비록 오랫동안 아버지를 증오했지만, 돌이켜보면 그 증오심은 오히려 불과 물과 망치가 되어 나를 담금질해온 셈이었다. 덕분에 내 의지는 강철같이 단단해질 수 있었다.
아버지는 이 거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진정한 토양을 내게 길러준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가 내게 준 유일한 선물이자 가장 소중한 유산이었다.
한 해, 두 해,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는 그 선물의 진정한 가치를 뼈저리게 실감하곤 한다.
출처 :
https://www.hani.co.kr/arti/politics/polibar/964285.html#csidxd8b0604703f7b588f66e0c0240e205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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