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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뉴스

이완용 척살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의 유언

 

 

 

이재명의사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진안(鎭安), 아명은 이수길(李秀吉)이다.

 

을사오적인 이완용을 암살하기 위해 명동성당에서 돌아오는 그를 단도로 습격했으나 미수에 그쳤으며

재판소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910년 9월 30일 순국하였다.

해방 이후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추서되었다.

 

 

 


1909년 만주의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의 저격으로 죽자

국내에서는 이완용·이용구·송병준을 처단하기로 하였다.

이완용은 이재명, 이용구는 김정익, 송병준은 이동수가 담당하여 죽이기로 결정하고,

1909년 12월 22일 서울 종현 천주교회당(오늘날 명동성당)에서

이완용이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

군밤 장수로 변장하고 있다가 오전 11시 30분에 인력거를 타고 지나가려는

이완용의 허리와 어깨를 칼로 3번 찔렀다.

이 과정에서 이완용과 이재명 사이를 막아섰던 인력거꾼 박원문이 칼에 찔려 사망하였고,
부상당한 이완용은 대한의원에서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의 치료와 대수술을 받은 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이게 한국의 흉부외과 수술 제1호이다.

이때 이완용을 치료한 일본인 의사가 말하기를 

"외과 의술의 발전이 10년만 늦었어도 이완용은 이 날 죽었다."고 하였다. 


경시청 체포되어 조사를 받은 이재명 의사는 일본 경찰이 "공범이 있느냐?"고 묻자 

"이러한 큰일을 하는데 무슨 공범이 필요하냐. 공범이 있다면 2,000만 우리 동포가 모두 나의 공범이다."고 말했다.

이듬해 4월 열린 재판에서도 "도와준 자를 말하라"는 일본인 재판장 스가하라에게 

"이완용을 죽이는 것을 찬성한 자는 우리 2,000만 동포 모두며, 방조자는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엄숙한 목소리로 역적 이완용의 8개 죄목을 거론하며 통렬하게 비판했다.


의사는 1910년 5월 18일 경성지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의사는 사형 선고를 받고 꼿꼿한 자세로 재판장을 꾸짖으며 이렇게 최후 진술을 했다.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내 목숨을 빼앗을 수는 있으나 나의 충혼, 의혼(義魂)은 절대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한번 죽음은 슬프지 않다. 생전에 이루지 못한 일이 한심스러울 뿐이다. 

내 결코 죽어서 그 원한을 갚을 것이다."

 

의사는 조선총독부 체제 발족 바로 전날인 1910년 9월 30일 순국했다. 

의사는 "의거를 공모한 사람들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보호하면서 끝까지 단독 범행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김병록 등 동지 10여 명도 최고 징역 15년형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재명 의사는 1910년 9월 30일, 결국 경성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했다.

이 때 순국 직전에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

 

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여담으로 비록 이재명 의사가 이완용을 그 자리에서 죽이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완용은 이때 입은 상처 때문에 17년간 폐렴을 고질병으로 달고 다니며 고생하다가

결국 1926년에 그로 인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