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봉 한호, 우리에겐 한석봉으로 알려진 조선시대 최고의 명필이다.
그와 어머니의 떡썰기 일화가 교과서에 실려 있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
하지만 그렇게 그가 조선최고의 명필이 되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런 그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잘 알져지지 않았다.
이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최고의 명필 한석봉의 실제 이야기
한석봉이 글씨로 얻은 이름값에 비해 벼슬로서는 그리 잘 나간 편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글씨만 잘 썼기 때문이다.
진사시만 겨우 합격해서 사자관(寫字官: 공문서의 글씨를 깨끗하게 정리하는 하급관리)에 머물렀으며, 선조가 그 글씨를 아껴 별제라는 관직을 제수했지만 대과에 합격하지 못한 자가 관직에 오르는 것은 부당하다며 참으로 야멸차게 비판받았다. 사헌부에서 그에 대한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을 보면
"와서별제(瓦署別提) 한호(韓護)는 용심(用心)이 거칠고 비루한 데다 몸가짐이나 일 처리하는 것이 이서(吏胥:이방)와 같아, 의관(衣冠)을 갖춘 사람들이 그와 동렬(同列)이 되기를 부끄러워하니 체직시키소서."
자세한 비위 사실이나 능력 문제는 없고 그냥 사람 자체가 찌질하다는 수준이다.
그래도 서예 솜씨만은 명나라에 알려질 정도로 뛰어나 임진왜란 때 중국 관리를 접대하는 데 동원되었고, 그 공로로 왜란 후 선조가 경기도 가평군수로 보냈지만, 글 쓰는 것과 지방행정은 엄연히 다른 데다 왜란 직후 피폐한 형편까지 겹쳐 가평을 말아먹은 죄로 탄핵되어 강원도(북한) 통천 현감으로 좌천되었다. 조선 최고의 화가 김홍도도 그림만 그리다가 연풍현감 맡았지만 무능한 관리로 제 할일을 하지 못했다.
선조가 그를 가평에 보낸 것도 물 맑고 산 좋고 한양에서 가까운 곳에서 글이나 쓰며 지내다 문서 작성할 일 있으면 빨리 달려오라는 것이었다. 그는 관료로서는 재능이 영 없었던 것 같다.
이렇게 좌천되자 그는 임진왜란 공신의 교서와 녹권을 제 마음대로 휘갈기다가
1604년에 파직당한 뒤 이듬해(1605)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한석봉의 글씨체는 '정석'에 가까웠다. 그래서 한석봉의 글씨체는 국가 문서의 표준서체를 확립했으며, 컴퓨터나 교과서에서 쓰이는 현대 서체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안정감이 느껴지게 하는 특유의 강건한 서체는 현대 한국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한자 서체이다. 한글과컴퓨터에서 출시한 문서편집 프로그램 시리즈들의 한문 서체로도 익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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