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왕족을 처단한 유일한 독립운동가 조명하 선생
조명하(趙明河, 1905년 5월 11일 ~ 1928년 10월 10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황해도 송화군에서 태어났다. 조명하는 효제충의 가문인 아버지 조용우의 차남으로 출생하여 풍천마을에서 학문을 수학하고 심신을 단련하며 성장했다. 1926년 신천군청 서기로 근무하였고, 학문을 익히려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 하던 중 독립운동의 큰 뜻을 품고, 대만을 거쳐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황해도 출신의 독립 운동가들인 안중근, 김구, 노백린과, 송학선의 금호문 사건이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1926년 9월 일본의 오사카로 건너가 야간학교를 다니며 고학을 했다. 그해 말에는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사건도 일어났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기로 마음먹고 1927년 11월 중간 기착지로 타이완에 들렀다. 타이완 타이중의 상점에서 일하다가 히로히토 천황의 장인인 일본 제국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王)가 검열사로 타이완에 온다는 것을 알고, 그를 척살하기로 결심했다.
조명하는 칼 쓰는 법 등을 익혀 준비한 뒤 1928년 5월 14일 독을 바른 칼을 들고 구니노미야의 행로에서 인파에 묻혀 대기하다가, 그가 무개차를 타고 지나가는 순간 차에 뛰어들어 독검으로 그를 자격, 즉사하지는 않았으나 칼에 찔린 상처에서 패혈증이 생겨 다음해 1월 죽었다.
조명하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7월 18일 사형 선고를 받은 뒤 24세의 나이로 10월 10일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사형당하면서 순국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조선 총독 야마나시 한조가 사임하였다. 그는 사형당하기 전에 “나는 삼한(三韓)의 원수를 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 하리라.” 라는 유언을 남겼다. (1928년 10월 10일 오전 10시 타이완 타이페이의 일제 처형장에서 순국)
1963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독립장을 수여 받았다. 1978년 대만 타이페이 시 한인학교에 동상을 건립하였고, 1988년 5월 14일 의거 60주년 기념으로 서울대공원에 동상을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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