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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사연

원로배우 신영균 그가 기부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금혼식


1. 91세 원로배우 신영균씨가 남은 것 다 베풀고 갈 것이라며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할 뜻을 밝혔다.  

1960~70년대 한국 영화계를 이끈 원로배우 신영균씨는 “앞으로 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아직 구체적 계획까지 세우진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재산을 영화계 지원과 후배 육성에 힘쓰는데 쓰여지길 바랐다.  




2. 연예계 최고의 자산가로 이름난 신씨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으로 꼽힌다. 2010년 명보극장(명보아트홀)과 제주 신영영화박물관 등 500억원 규모의 사유재산을 한국 영화 발전에 써달라며 쾌척해 화제가 됐다. 모교인 서울대에도 시가 100억원 상당의 대지를 발전기금으로 기부했다. 배우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60~70년대에 많게는 1년에 30편씩 영화를 찍어 가며 모아 온 재산이다.

  

3. 신영균씨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술·담배는 물론 여자와 도박도 멀리해 왔다. 

“제가 조금 재미없게 살았죠. 그래도 원칙 하나만큼은 절대 놓치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이제 내가 나이 아흔을 넘었으니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그저 남은 거 다 베풀고 가면서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어요. 나중에 내 관 속에는 성경책 하나 함께 묻어 주면 됩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이다.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를 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오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4. 신씨가 2010년 사회에 내놓은 명보극장은 그의 보물 1호였다. 1977년 8월 당시 7억5000만원에 인수했던 극장의 자산가치가 40년 새 60배 넘게 뛰었다. 그는 500억원 줄 테니 팔라는 제의를 거절하고 이를 기부한 것이다. 

 

5. 신씨의 기증 재산을 토대로 2011년 신영균영화예술재단이 출범했다. 재단은 건물 임대료와 기부금 등 각종 수익금으로 9년째 영화인 자녀 장학금 지급, 단편영화 제작 지원 등을 하고 있다. 지난 6일에는 ‘제9회 아름다운 예술인상’ 시상식을 성황리에 개최했다. 연극·영화계 인사들의 공로나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 마련한 상인데, 이 분야의 상금(5개 부문 총 1억원)으로는 최고 액수다.


6. 신씨는 60년대 엘리트 배우로 주목을 받았다. 55년 서울대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2년 후 서울 회현동에 ‘동남치과’를 열었다. 그러다 서울대 출신의 잘나가는 치과의사에서 배우로 인생 항로를 바꿨다. 무엇보다 연기에 대한 갈망이 컸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연기에 대한 열정을 불살랐던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연극 무대에 뛰어들었다. 어머니가 신발을 던져가며 만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국 영화 전성기로 꼽히는 60년대는 배우 신영균에게도 황금기를 안겼다. 60년 영화 ‘과부’로 데뷔하면서 그간 연극으로 다져온 연기 실력을 단박에 인정받았다. 요즘으로 치면 벼락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상록수’ ‘연산군’ ‘빨간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번’ 등 19년 동안 300여 편에 출연했다.


7. 그는 상복도 많았다. ‘연산군’(1962), ‘열녀문’(1962)으로 1, 2회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상록수’(1961), ‘빨간마후라’(1964)로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 등을 받았다. 

 

8. 신씨는 충무로의 ‘바른생활 사나이’로 유명하다. 화려한 스크린과 함께하면서도 가장의 책임, 가정의 행복을 삶의 1순위에 올려놓았다. 60년대 사생활 관리 소홀로 재산·가족 등을 잃은 많은 스타 배우들과 차별화된 지점이다. 그는 “다른 배우들보다 영화를 늦게 시작했고, 이미 아내와 아이가 있었기 때문에 책임감이 더 컸던 것 같다”고 돌아봤다.


 9. 신씨는 사업 수완도 뛰어났다. 60년대 초 이름난 빵집이었던 명보제과를 600만원에 인수했다. 당시 명보제과는 뉴욕제과·태극당·풍년제과 등과 함께 4대 제과점으로 인기를 끌며 25년간 성업했다. 1971년에는 볼링장을 인수하였고, 1973년에는 빌딩관리업체인 '한주흥산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부동산임대사업에까지 뛰어들어 영화배우 못지않은 사업수완을 보였다. 1977년 8월에는 명보제과 바로 옆에 있는 명보극장을 7억 5천만원을 들여 사들인 이후, 《지옥의 묵시록》과 《빠삐용》 등의 외국 영화와 《내가 버린 여자》, 《별들의 고향 2》, 《미워도 다시 한번》 등의 한국영화를 배급·상영하여 대박을 터뜨렸다. 1985년서울 종로구 관훈동에 지상 14층 지하 4층의 빌딩을 건립하고 지하 2,3층에 명보소극장을 차렸다. 1992년에는 한국에 진출하려는 미국 외식패스트푸드업체인 맥도날드사와 신영균이 함께 49 대 51의 비율로 54억원의 자본금을 투자하여 서울에 합작회사인 '맥신산업'을 설립하였다. 

 

10. 신씨는 68년부터 한국영화배우협회장·한국영화인협회장·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 회장 등을 역임하며 충무로의 권익 향상에도 앞장섰다. 15, 16대 국회의원(1996~2004년)을 지내면서 국내외 문화예술 진흥에 힘썼다. 1999년 6월 5일남제주군 남원읍 바다기슭 2만 4천여평 대지에 사재 100여억원을 들여 한국 최초의 영화박물관인 '신영 영화박물관'을 개관하였다.[29] 2010년, 영화 및 예술계 인재 양성을 위해 500억원 상당의 사재인 서울 중구에 위치한 복합공연시설 명보극장(명보아트홀)과 국내 최초이자 최대의 영화박물관인 제주도 신영영화박물관을 영화계 및 문화예술계의 공유재산으로 기증하여 화제를 모았다. 




11. 그가 본격적으로 기부를 시작하게 된 것은 2006년 금혼식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 그들은 화려한 금혼식을 계획했으나 부부가 상의하여 금혼식에 쓸 비용 1억원을 신문사의 불우이웃돕기에 성금으로 냈고, 그 때 좋은 일을 하면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이후 계속해서 기부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