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확인된 유적지와 터를 기준으로 옛 신라시대 경주를 재현하였다.
1. 삼국사기에서
9월 9일에 헌강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함께 월상루(月上樓)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성 안에 초가집은 하나도 없고 서울(경주) 백성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이 시중 민공(敏恭)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지붕을 덮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를 쓰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인가?” 민공이 “신(臣)도 역시 일찍이 그와 같이 들었습니다.” 하고는 아뢰었다. “임금께서 즉위하신 이래 음양(陰陽)이 조화롭고 비와 바람이 순조로와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고 변경은 평온하여 민간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룩하신 덕의 소치입니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이는 경들이 도와준 결과이지 짐(朕)이 무슨 덕이 있겠는가?”
2. 산국유사 승려 일연이 쓴 권1 진한조를 보면, “신라 전성기 경주에 17만8936호, 1360방, 55리와 35개의 금입택(金入宅: 고위층 주택)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호를 가구로 치면, 5인 가구 기준 70만~80만, 심지어 100만 이상 인구를 추정할 수 있다. 방은 고대 도시 구역의 기본 단위다. 모량리 유적과 1980~90년대 경주 도심 황룡사 왕경 유적 발굴 성과까지 포함하면, 1방의 크기는 가로세로 각각 160~120m로 추산된다.
발굴단은 모량리 일대에만 최소 200개 이상 방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 이에 따른 방의 개수를 현재 경주 안팎의 땅 크기에 맞춰보면, 경주 도심은 900여방, 외곽의 모량리 방까지 합쳐 1360방에 얼추 들어맞게 된다. 방이 경주 남쪽의 불국사 근처 말방리까지 뻗어 있었다는 설(전덕재 단국대 교수)까지 넣으면, 고대 경주는 동서 30㎞, 남북 20㎞에 달하는 광역 대도시였다는 추정 또한 가능해진다. 지금 서울 한강 이남 지역의 면적을 훌쩍 뛰어넘는 규모다.
3. 삼국유사에서 신라의 금성이 1360방으로 되어 있었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실제로 황룡사터나 왕성터 그리고 나중에 발견된 경주 북쪽의 모량리 유적을 통해서 하나의 방이 120에서 160미터의 직사각형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경주 전역을 나누면 1360방이 얼추 맞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360방이 아니라 360방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으나 이는 경주의 면적을 너무 좁게 본 것으로 생각됩니다. 모량리 유적을 경주의 확장으로 볼 것이냐 위성도시로 볼 것이냐는 학자마다 이견이 있습니다. 다만 이 모량리에만 추산해서 100~200방 정도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므로 360방 설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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